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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기행]컨템퍼러리 와이너리와 고전주의 와이너리
등록일
2013-10-18 오전 10:55:12
글쓴이
관리자
내용
토레스가 현대 와인산업을 대표하는 컨템퍼러리 와이너리라면, 루베르테는 전통과 자연을 중시하는 고전주의 와이너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럽에서 와인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가장 넓은 뜻으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알코올 음료를 총칭하고, 두 번째로는 과일로 만든 모든 술(애플 와인), 그리고 가장 좁은 의미로는 포도즙으로 만든 술을 말한다. 그것은 유럽의 주류문화에서 맥주를 제외하고는 와인이 전부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와인은 천지인(天地人)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천’은 포도의 수확연도인 빈티지를, ‘지’는 생산지역인 테루아를, 그리고 ‘인’은 와인메이커를 말한다. 와인메이커는 기후(빈티지)와 토양(테루아)에 적합한 포도를 선택하여 재배하고, 정성껏 와인을 담그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좋은 와인은 최고의 천지인, 즉 날씨가 좋았던 해에 최적의 테루아에서 수확한 포도로 훌륭한 양조가가 만든 농산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의 와인은 대부분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고, 자연환경에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에 대량생산보다는 양질의 소량생산이 대세였다.


7월의 태양 아래 영글어가는 카베르네 쇼비뇽. 스페인에서 가장 큰 토레스 와이너리의 페네데스 포도원.


1년에 약 6000병 정도만 생산하는 세계에서 제일 비싼 와인 로마네 콩티(Romanee Conti)가 대표적인 예다. 몇 년 전 파리의 한 유명백화점에서 2005년산 로마네 콩티 한 병이 2만 유로인 것을 보고 필자도 놀란 적이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예술품이라 할 수 있다. 구세계(유럽)의 명품와인들이나 신세계의 일부 부티크(혹은 컬트)와인들은 여전히 이러한 생산방식과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일종의 고전주의 미술이나 음악이라고나 할까?

과거의 와인은 1차(포도의 재배)와 2차(와인의 제조) 산업을 통한 노동집약적 농산품이었다면, 현재는 1, 2차뿐만 아니라 3차 산업(서비스, 마케팅)이 결합된 거대한 자본집약적 제조산업으로 변모하였다. 1866년 파스퇴르의 획기적인 발효 이론의 정립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신세계 와인산업(미국, 남미, 호주 등)을 중심으로 세계 와인산업은 크게 변화되어 왔다. 즉 자연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사람의 역할을 최소화했던 고전적인 천지인과,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기술혁신을 통한 대량생산과 과감한 마케팅 전략을 도입한 현대적인 와인산업의 양대 산맥으로 재편된 것이다.

미국·칠레까지 진출한 다국적 기업
필자는 현대 와인산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토레스(Torres) 와이너리와 아라곤 제국의 옛 땅에서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루베르테 와이너리를 방문하였다. 스파클링 와인 카바로 유명한 카탈루냐의 페네데스 지역은 새롭게 떠오른 프리오랏(Priorat) 지역과 함께 레드와인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는 스페인에서 가장 큰 규모의 토레스 와이너리는 가족 중심의 다국적 기업으로, 스페인의 주요 와인 생산지역 뿐만 아니라 미국의 캘리포니아, 칠레의 센트럴 밸리까지 진출하여 그들의 브랜드 네임을 전 세계에 떨치고 있다. 토레스 가문은 300여년 전부터 이곳에서 포도를 재배해 왔으며, 1870년부터 본격적으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140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현재 1900ha의 포도원에서 연 3000만병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토레스의 톱 브랜드인 마스 라 플라나(Mas La Plana)는 페네데스의 토착 품종이 아닌 프랑스에서 도입한 카베르네 쇼비뇽으로 만든 와인이다. 1979년 파리에서 개최된 와인 올림피아드에서 1970년산 와인이 샤토 라투르를 누르고 당당하게 카베르네 쇼비뇽 레드와인 분야에서 1등을 차지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전통을 중시하는 아라곤 지방의 루베르테 와이너리의 대형 오크 발효탱크. 용량이 1만6000리터다.

토레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점령 기간 중 미국 시장을 집중 공략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매년 300만 유로의 연구비 투입, 유기농법의 도입, 지구의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한 환경보호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특히 미국의 전설적 와인메이커 로버트 몬다비 가문의 가족경영 실패를 거울 삼아 65세에 은퇴하되 70세까지 명예사장을 하면서 후계자를 육성하여 가업을 승계시킨다는 경영철학은 와인산업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분야에서도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이 있고, 와인 박물관을 겸하고 있는 셀라도어에서 간단한 점심과 함께 와인을 시음하였다. 대표 와인 마스 라 플라나 2007년산은 프랑스산 뉴 오크에서 18개월간 숙성시킨 후 병입한 와인으로 보르도 타입의 풀바디 와인이었다. 짙은 붉은 색으로 체리, 마른 꽃과 담배향 속에 스며든 송로버섯, 자두와 바닐라의 미묘함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복합성과 균형감이 아직 발현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토레스 와이너리의 와인박물관 겸 시음장.


아라곤 지방의 전통 양조방식 고수
토레스 와이너리 방문을 마치고 오후에는 중세 아라곤 제국의 수도였던 사라고사(Zaragoza) 근교에 있는 루베르테 와이너리를 방문하였다. 중세에 카탈로냐와 병합하여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나폴리까지 지배했던 아라곤 왕국은 1469년 페르난도 왕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과 결혼하여 스페인 통일의 중심에 섰으나 농업이 주산업으로, 스페인에서는 가장 낙후된 지방이다. 마을 언덕에 중세풍의 성당이 인상적인 작은 와인 마을 마가욘(Magallon)에 위치한 루베르테 와이너리는 24ha의 소규모 포도원에서 오너인 수자나 루베르테(Susana Ruberte) 여사가 남편, 딸, 동생과 함께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양조학을 전공한 후 1982년에 가업을 승계받은 그녀는 아라곤 지방에서 몇 남지 않은 전통 양조 방식을 이어가고 있는 와이너리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포도 수확부터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며, 아라곤 지방의 전통 방식인 1만6000리터의 거대한 오크통에서 1차 발효시킨 후, 220리터의 오크통에서 일정 기간 숙성시킨 후에 병입한다. 그르나슈, 템프라니요, 마카베오 등의 토착 품종 외에도 멜롯, 시라, 카베르네 쇼비뇽 등의 국제 품종을 재배하고 있다. 특히 부드럽고 스위트하면서 마시기 좋은 여성전용 와인 알리아나(Aliana)를 만들어 생긴 판매수익금 전액을 여성유방암협회에 기부하고 있었다.


루베르테 와이너리의 오너 수자나 루베르테 여사와 가업을 승계받을 대학생 딸. 들고 있는 와인이 딸이 만든 여성용 와인 알리아나다.

앞으로 가업을 승계할 딸이 만든 와인을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의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전통 방법으로 만든 루베르테 리제르바(Ruberte Reserva) 1996년산을 시음하였는데 붉은 체리 빛깔에 스파이시하면서 숨겨진 듯한 담배·가죽향과 함께 입안에 흐르는 섬세하고 균형 잡힌 풍미가 일품이었다. 토레스가 현대 와인산업을 대표하는 컨템퍼러리 와이너리라면, 루베르테는 전통과 자연을 중시하는 고전주의 와이너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방식이 미래의 와인산업을 선도할지는 전적으로 와인 소비자들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전통과 혁신의 두 수레바퀴가 인류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듯이 와인산업의 발전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스페인 와인산업의 메카 리오하로 향했다.

글·사진|송점종<우리자산관리 대표, Wine MBA> j-j-so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