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필리포나는 샴페인 그룹 Boizel-Chanoine Champagne(BCC)에 합병되었지만, 그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필리포나 가문의 16대손인 샤를 필리포나가 1999년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역사적으로 샴페인은 일반 와인과 달리 샴페인 하우스의 전통과 명성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상류문화의 이미지를 강조한 귀족 명품 마케팅 전략으로 성장해 왔다. 기술적으로는 전통적인 샴페인 양조법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샴페인 역시 와인으로서 테루아와 포도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새로운 양조법과 싱글 빈야드(단일 포도원 혹은 구획)의 빈티지 샴페인을 소개하는, 일종의 샴페인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of Champagne) 경향이 일어나고 있다. 오랜 전통을 이어온 퀴베 와인의 샴페인 양조방식은 대부분의 소비자들로 하여금 이 지방의 특별한 테루아의 성격과 단일 포도원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하고 있다.
필리포나의 유명한 클로 데 고아세 포도원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마레이 마을. 뒷편에 마른강과 연결된 운하가 보인다.
실제로 250곳 이상의 다른 구획에서 생산된 포도를 배합한 퀴베로 생산하는 논 빈티지(NV) 샴페인의 맛을 구별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이곳 포도원을 방문할 때마다 한결같이 우아하게 빛나는 하얀 거품의 샴페인이 이곳 백악질의 토양을 닮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연평균 기온이 섭씨 10.5도를 넘지 않고, 겨울이 춥지만 과숙기간인 가을은 기온이 높고 길다. 토양은 지질연대의 제2기에 형성된 두꺼운 백악질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쉽게 수분을 흡수하고, 낮 동안 조사된 태양열을 복사하기에 최북단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도 재배에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체적으로 서늘한 기후는 신선하고 상큼한 맛의 샴페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산도가 풍부한 피노누아와 샤르도네의 재배에 적합한 기후이다.
애호가들 샴페인의 ‘로마네 콩티’로 불러
필자는 테루아와 빈티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와인 고유의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샴페인 생산을 선도하고 있는 필리포나 샴페인 하우스를 찾았다.
샴페인 애호가들에게 샴페인의 ‘로마네 콩티’라고 일컬어지는 필리포나는 마레이 쉬르 아이와 아이 지역에서 1552년부터 포도를 재배하다가 17세기부터 샴페인을 생산해 온 500년 전통의 샴페인 명가다. 특히 1935년에 로마시대부터 와인을 생산해 왔던 역사적인 클로 데 고아세 포도원을 매입하여 이 지방 최초로 싱글 빈야드 샴페인을 소개한 위대한 개척자다.
에페르네에서 마른 강을 건너 동쪽으로 마른 강과 운하로 연결되어 있는 마레이 쉬르 아이에 있는 필리포나까지 가는 동안 나지막한 랭스 산 남향 경사면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아이 지역의 최고급 그랑크뤼 포도원들을 볼 수 있었다.
1997년 필리포나는 샴페인 그룹 Boizel-Chanoine Champagne (BCC)에 합병되었지만, 그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필리포나 가문의 16대손인 샤를 필리포나가 1999년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와이너리에 도착하니 필리포나 사장이 직접 필자를 맞이하였다. 영국의 세계적인 샴페인 전문 잡지 ‘Fine Champagne Magazine’의 취재진들과 함께할 계획이었는데 그들의 도착이 늦어, 먼저 와이너리 인근에 있는 그 유명한 클로 데 고아세 포도원으로 안내되었다.
최초의 싱글 빈야드 샴페인 ‘클로 데 고아세’로 유명한 500년 역사의 필리포나 샴페인 하우스.
클로 데 고아세는 남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는 5.5ha 면적의 작은 포도원이다. 많은 일조량과 풍부한 백악질의 토양으로 인해 샴페인 지역의 평균 기온보다 섭씨 1.5도가 높아 양질의 피노누아와 샤르도네를 생산하는 최고의 테루아가 되었다. 계단을 따라 성모상이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가니 북쪽의 랭스 산과 남쪽의 마른 강 계곡의 포도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아로마, 라임향 풍미 ‘클로 데 고아세 2004’
성모상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에 마을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곳은 1차 세계대전의 주요 격전지였으며, 와이너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시설들이 철저하게 파괴된 아픈 역사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의 공습을 피해달라는 기원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 덕분인지 오히려 연합군의 오인 폭격으로 파괴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통해 안정적으로 샴페인을 공급받기 위한 나치의 생산 장려 정책 때문이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어쨌든 샴페인으로서는 참으로 행운이었다. 심지어 나치 당국은 도자주(앙금을 제거하고 설탕과 이스트 혼합물을 채워주는 과정)에 필요한 설탕을 전쟁 중에도 지속적으로 생산자들에게 공급하였다고 한다. 물론 샴페인 구매 가격은 정책적으로 결정하였지만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이었다고 필리포나 사장은 설명하였다. 취재진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필자는 그들과 함께 샴페인을 시음하기 위해서 다시 와이너리로 돌아왔다. 기사로만 접했던 유명한 편집자인 에시 아벨랑 여사와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시음에 들어갔다.
국내에서 여러 차례 시음한 경험이 있지만 2013년에 데고르주망(앙금제거)하여 논-도자주(Non-Dose) 방식으로 생산한 NV 필리포나 로얄 리저브와 최고급 싱글 빈야드 샴페인 ‘클로 데 고아세 2004’가 인상적이었다. 논-도자주 방식은 일명 Zero-dosage 또는 Brut nature라고 하는데 싱글 빈야드와 함께 최근 유행하고 있는 샴페인의 새로운 양조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남쪽으로 경사진 클로 데 고아세 포도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샤를 필리포나 사장. 뒤쪽에 보이는 강물이 마른 강과 연결되어 있는 운하다.
샴페인의 스타일은 필자가 스페인의 카바를 소개할 때 설명한 바 있지만 당도가 1리터당 6g 미만인 엑스트라 브뤼부터 브뤼, 엑스트라 드라이, 섹, 드미 섹, 그리고 50g 이상인 가장 달콤한 두로 구별한다. 이러한 스타일은 도자주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설탕을 첨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데 논-도자주는 설탕을 넣지 않은 순수한 브뤼 퀘베를 채워주는 방식이다. 또한 사용하는 포도 품종에 따라 100% 샤르도네면 블랑 드 블랑, 피노누아면 블랑 드 누아라 하고 핑크색 샴페인은 로제라 한다.
‘NV 필리포나 로얄 리저브’는 일반 도자주 샴페인에 비해 수정같이 맑게 빛났으며 살아 있는 신선한 아로마와 함께 풍부한 백악질의 미네랄리티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클로 데 고아세 2004’는 필리포나의 명성을 알린 아이콘 상품으로 NV 로얄 리저브와 달리 전통적인 도자주 방법을 사용하나 최상의 싱글 빈야드에서 생산된 포도의 맛을 살리기 위해 리터당 4.3g으로 소량의 설탕을 사용하고 있었다. 65%의 피노누아, 35%의 샤르도네를 배합한 이 전설적인 샴페인은 이 지역 최초의 싱글 빈야드 샴페인이다.
옅은 황금빛을 띠는 투명한 색깔, 비단결 같은 섬세함과 신선하면서 복합적인 흰 과일류의 아로마, 라임향이 피어나는 미네랄의 오랜 풍미는 이곳 테루아의 강건함과 순수함을 발현하고 있었다. 전통과 아방가르드, 어느 것이 앞으로 이 지역의 샴페인 사업을 선도할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필리포나 클로 데 고아세’는 파리에 있는 미술랭가이드 별 두 개의 르 생크 레스토랑을 포함하여 전 세계의 미식가와 와인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식당과 호텔뿐만 아니라 에어프랑스와 JAL 1등석에서도 서빙되고 있다.
<글·사진 송점종 우리자산관리 대표·Wine MBA j-j-song@hanmail.net>